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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의 전문분야를 절대로 놓지 마세요"
    이프 / 2010-11-09 06:5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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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에서 만난 한국인 자원봉사자 민숙기

     
    뉴욕에서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게 두 아이를 키우려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책이나 자료가 있는 ‘한국문화원’을 드나들게 되었다. 여덟 살에 엄마 따라 미국에 온 딸아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인류 역사상 조지 워싱턴이 최고의 대통령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가?  놀랄 일도 아닌 것이 미국 공립학교에서 아직도 조지 워싱턴에 대한 갖가지 이야기를 어린 아이들에게 가르쳐서 존경심을 갖게 하고 미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딸아이의 이러한 변화 때문에도 하루 빨리 한국에 돌아가려 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문화원 문턱이 닳도록 책을 빌려다 읽게 하고 한국 영화 DVD도 빌려다 꾸준히 보여주고 있다.
     
    박물관과  문화원에서  자원 봉사하는 할머니를  발견하다
     
    어느 날 문화원에 책 빌리러 갔다가 도서 대출업무를 하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봤다. 그 분은 자신을 ‘자원봉사자’ 라고 소개했다. 언뜻 보기에도 칠십은 넘어 보였다. 곱게 빗어 넘긴 반백발에 책을 스캔하는 모습은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어서 뇌리에 인상 깊게 남았다.

    미국에 처음 왔을 무렵 메트로폴리탄 박물관(MET)에 갔다가 안내데스크에 앉아 자원봉사 하는  한국인 할머니를 뵌 적이 있다. 그 분이 문화원에서 뵌 바로 그 할머니라는 것은 최근에 알았다.

    '뉴욕 가정상담소’에서 ‘가정폭력 24시간상담 핫라인 서비스’ 봉사를 시작한 지 7개월에 접어들면서 스스로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한편 ‘이런 봉사를 어찌하면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할 수 있을까?’라는 화두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 할머니를 다시 뵙고 무릎을 탁 쳤다.

    ‘저 분께 배워야겠다.  뭔가 비결이 있을 거야.’

    바로 인사 드리고 인터뷰를 할 수 있을지 여쭈었다. 할머니는 단골인 나를 알아보셨다. 인터뷰는 유명한 사람이나 훌륭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지 왜 자기 같은 평범한 사람을 인터뷰하려고 하냐며 손사래 치셨지만 결국 의협맘의 고집에 10월28일 뉴욕 문화원에서 민숙기선생님(78)을 인터뷰할 수 있었다
    .
     
                                                            ▲원로 자원봉사자 민숙기선생님(78세)

     
    어려서 보고배운 봉사, 첫 직장은 전쟁 희생 가족을 돕는 일
     
    강수정: 저는 자원봉사 초보, 선생님은 자원봉사 원로, 초보와 원로가 만났습니다.

    민숙기: 어디서 봉사하세요?

    강수정:  ‘뉴욕 가정상담소’에서 올 봄7주 훈련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한달에 두번씩 ‘가정폭력 상담 핫라인 서비스’를 하고 있는 새내기입니다. 선생님은 처음 어떻게 자원봉사를 시작하셨어요? 어떤  계기라도?

    민숙기: 글쎄, 계기랄 건 없고 그냥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던 게 있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집안에서 교육사업을 했거든요. 할머니가 늘 저녁밥을 지어 선생님들을 대접했고 선생님들이 밥 먹으며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도 하고 그랬었지요. 아버지 어머니도 아이들 가르치며 허드렛일까지 다 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라서인지 내 첫 직장이 ‘한국전쟁 미망인을 돕는 양친회’ 케이스 워커'였어요. 미국 선교단체에 전쟁미망인의 어려운 사례를 서류로 작성해 보내는 일이었죠.

    강수정: 그럼 영어로 작성하셨겠네요? 젊어서부터 영어를 잘 하셨나 봐요?

    민숙기:  대학을 미국에서 나왔거든요.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가 처음 잡은 직장이었지요. 참 그 일을 열심히 했어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지요. 제가 서류를 구구절절 작성해 올리면 그 어려운 전쟁 피해자들에게 구호품이나 지원금이 오곤 하죠. 지원금은 서류를 얼마나 실감나게 작성하는가에 따라 달라져요. 여분의 종이를 두세 장씩 덧붙여서 길게 그리고 아주 슬프고 눈물 나게 사연을 기록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소문을 듣고 ‘양친회’를 찾아온 사람 중에는 민숙기 케이스 워커에게 맡기고 싶다는 사람이 꽤 있었어요.

    강수정: 사회복지사 같은 일이네요. 인기 좋으셨나 봐요. 혹시 기억나는 사연이나 사람이 있는지요? 

    민숙기:  한 부인이 찾아와 하소연하는데 집에 화장실도 없고 지을 형편도 안되어 남의 집에 가거나 아무도 안 볼 때는 뒤뜰에 볼일을 보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사연을 구체적으로 적어 미국에 보냈었지요. 얼마 뒤 화장실 지어주라는 지원금이 왔어요. 저는 20대 중반 나이에  화장실 짓는 일을 총감독해야 했지요. 일할 사람 구하고 자재를 사고, 그렇게 한 달 걸려 화장실이 완공됐을 때, 그 아줌마랑 아이들이 얼마나 기뻐했던지! 저도 궁전이라도 완성한 것처럼 감동했었지요. 그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강수정:  와우! 감동적이네요. 그 때가  전쟁직후였나요?

    민숙기:  1959년쯤 됐을 겁니다.

     

                                                  ▲뉴욕 문화원에서 인터뷰 중인 필자와 민숙기 선생님



     
     시부모님 명으로 그만둔 직장, 아직도 아쉬움으로남아  


     
    강수정: 그 일을 얼마나 오래 하셨어요?

    민숙기:  3년 정도? 그 때 남편을 만나 첫아이를 가졌는데, 시부모님께서 '몸도 무거운데 일을 그만두는게 어떠냐' 고 권고 하셨습니다.  정말 그만두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그만두었지요. 

    강수정:  아! 많이 안타까웠겠어요.

    민숙기: 지금도 텔레비전 같은 데서 사회복지 분야를 대표하는 여성이 토론 패널로 나오는 것을 보면 부럽고, 나도 그 때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지요. 

    강수정:  그럼 그 뒤로 다른 직업은 갖지 않으셨나요?

    민숙기: 남편이 외교관이어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게 되었지요. 외교관 부인은 돈 버는 일은 금지되어 있어요. 봉사만 가능했죠. 그래서 아이들 학교에 가서 한국을 알리는  특강을 하기도 하고 다른 봉사도 했어요.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했어요. 한국은 제게 종교 같은 거예요.  남편과 주말에 아이들 데리고 가서 한국 홍보 자료 우송작업 같은 것을 하곤 했는데 한 번도 지치거나 싫다는 생각, 해본적 없어요.

    강수정:  어느어느 나라에 살아보셨어요?

    민숙기:  필리핀, 캐나다, 뉴질랜드, 싱가포르, 미국, 그리고 한국에 살아봤죠.

    강수정: 인터뷰 주제에서 좀 벗어나지만,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어디였나요?

    민숙기: 뉴질랜드가 참 살기 좋았어요. 사람들이 인정 많고 교양 있어요. 처음 뉴질랜드에 도착해   아파트로 이사 들어갔는데 짐 정리도 못해 엉망인 상태에서 갑자기 초인종이 울리더라구요.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나라에서 말이죠. 나는 지저분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대꾸도 하지 않았는데, 좀 있으니 또 벨이 울리는 거예요. 나가보니 어떤 아줌마가 옆집에 산다면서 이사하는 날은 요리도 못하고 굶는 경우가 많은데 뭐를 먹는지 몰라 케이크를 만들었다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케이크를 한 판 가지고 온 거예요.  그 친구는 뉴질랜드 사는 5년 동안 저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됐죠.

    강수정:  참 인정 많은 분이네요.

    민숙기:  아직도 연락하는 뉴질랜드 친구들이 많아요. 뉴질랜드를 떠날 때 아들이 중학교 졸업이 일년 남아서 기숙사에 보내고 우리는 먼저 나오려고 했는데 제 친구 세 명이 아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겠다고 나서더라구요.  정말 감동이었죠. 결국 기숙사로 보냈지만요. 

     

                                                              ▲필자(왼쪽)와 민숙기선생님(오른쪽)

     
    다시 스무 살이 된다면…
     
    강수정: 무보수 봉사를 오랫동안 하시면서 그만두고 싶거나 상처 받은 적은 없었나요? 

    민숙기:  한 번 있었어요. 3년 전 브라이언 공원 근처 ‘뉴욕 국립도서관’에서 자료를 입력하는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가서 일을 배우는데 제가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를 하기 때문에 미등록 되어있던 오래된 책을 등록했었지요. 책 한 권 입력하는데 서른 가지 정도 목록을 찾아 입력해야 해요. 그 때 제가 뉴욕 문화원 도서관에서 10년 일하고 은퇴했을 때인데도 ‘과연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 의심이 들더라구요.  모든 것이 전산화된 새로운 시스템에 겁이 났던 거죠.

    강수정: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민숙기: 처음엔 겁났지만, 열심히 배우고 하다 보니 익숙해지더라구요. 거기서도4년 정도 봉사하다가 등록 사무실이 퀸즈 쪽으로 이사 가는 바람에 그만두게 되었지요. 무릎관절이 좋지 않아 그쪽 지하철 역 층계를 오르고 내리기 힘들더라구요.

    강수정: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가실 수 있다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런 생각 해 보셨어요? 

    민숙기: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제가 다시 젊어질 수 있다면, 전문 분야를 가질 것 같아요. 그게 참 후회가 되어요, 그 때 양친회를 그만두었던 것이. 지금 다시 그 상황이 된다면 절대로 나의 분야, 전문성을 놓치지 않을 것 같아요.

    강수정: <이프>의  여성독자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민숙기: 자꾸 반복이 되는데, 자신의 전문분야를 찾아서 끈을 놓지 말라고 말하고 싶네요. 아이들 키우는 동안에는 일 좀 줄이거나 쉬더라도 복귀할 수 있는 끈은 유지하라고요. 저는 오십대 중반까지 외교관 부인이라는 자리 때문에 직업을 가지지 못하다가 남편이 인도네시아로 발령받아 먼저 가서 자리 잡는 동안 심장마비로 돌아가고서  비로소 직장을 잡게 되었지요.

    강수정:  한참 일하실 나이인데 …
     
    자원봉사로 아름다운 노년을 마무리
     
    민숙기:  남편을 그렇게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갔어요. 미술관 성인 교육분야에서 일자리를 주어서 한3년 일하다가 아이들이미국에 있어 다시 미국에 오게 되었지요. 그때 문화원에서 오십대 후반인 제게 도서관 대출업무를 맡겨 주었고 한 10년 정도 일했어요. 그리고 그만두고 나서도 지금까지 일주일에 한 두번씩 나와 봉사하고 있습니다. 늘 일손이 모자라 쩔쩔매는 것을 내가 아니까 오지요. 뉴욕문화원이 내가 어려울 때 아무 자격도 없는 나이든 사람을 고용해준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도 되고. 이젠  일할 곳이 있다는 것이 좋아서 합니다.

    강수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는 언제부터 봉사하셨어요?

    민숙기: 한 5년 된 것 같아요. 한국인이나 일본인을 안내하는 일, 가끔 한국어 안내장 같은 것을 제작할 때 제가 번역하기도 해요.

    강수정:  그럼 화요일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은 문화원에서 자원봉사 하시는 거네요?

    민숙기: 예, 화요일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구경 오세요. 제가 입장권 뺏지 드릴게요. 돈 안내셔도 돼요.

    강수정:  다음 특별전 있을 때 꼭 가겠습니다. 오늘 말씀 들으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건강하게 오랫동안 즐겁게 봉사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선생님의 귀한 경험과 말씀을 보약 삼아 선생님처럼 봉사 활동에서 롱런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민숙기:  롱런하시유!

     
                                                    ▲메트로 폴리탄 뮤지엄에서 자원봉사하고 계시는 민숙기선생님

     
    자원봉사를 삶의 보람으로 여기며 열심히 하면서도 자신의 전문 분야를 꼭 가지라고 당부하시는 민숙기 선생님.  1932년 일제시대에 태어나 고착화된 성 역할을 따라 산 세대지만, 이 나라 저 나라를 경험하며 인터뷰에서 다 여쭙지 못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셨을 것이다.

    오십대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13년간 풀 타임 직장을 다녔고 은퇴하고도 일정을 짜서 자원봉사를 하며 아름다운 노년을 즐기는 선생님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다. 물론 그 분은 서른 살에 아들 네 명 딸린 가난한 청상과부가 된 내 시어머니에 비하면 출발부터 많이 달랐다. 허나 젊은 여성에게 남편이 잘 나가더라도 ‘너의 전문분야를 가져라’고 거듭 충고했다. ‘고학력 전업주부’가 늘어나고 있는 요즘 의미 있는 메시지가 아닐까? 
     
    -장소를 내어 주신 뉴욕 '한국문화원'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인터뷰에 동행해서 사진을 예쁘게 찍어주신 룸메이트 박현미님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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