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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회]노일저대구일의딸 원형 3
    이프 / 2014-06-19 07:54:38
  • ** 글의 전개상 두 번째 부인이라는 단어 대신 첩이라는 용어로 씁니다. 마찬가지로 일부다처제라는 용어 대신 처첩제란 용어로 쓰겠습니다.

    한 남자가 여러 여자와 관계를 맺는 처첩제 역시 일부다처제의 한 종류라고 볼 수도 있지만, 처첩제의 경우 처와 첩의 지위는 엄격히 다르고 첩 쪽과는 남자 개인 관계를 넘어선 가족, 사회관계는 맺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일부일처제의 강력한 남성적 변종’이라 생각합니다.

     

    첩. 남성중심의 질서

     

    첩은 어떤 보편적인 관념과 판단이 그 단어 하나에 이미 적용된다.

    간악하고 남의 피나 빨아먹는 존재로 이미지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리사욕에 눈멀고, 누구에게나 원한 가득하고, 다니는 곳곳에 반목과 불행의 기운을 풍기면서 키득키득 웃는, 그러면서 줏대도 속도 없이 아양이나 떨고 있는 것이 첩’이라는 생각은 ‘꼭두각시일 뿐인 처’라는 생각과 맥이 닿아 있다.

      

                                                                             ▲남사당놀이 꼭두각시놀음. 
                                                     우리나라 유일한 민속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의 남자 주인공 이름. 
                                                     박첨지와 박첨지 아내 인형 모습.(이미지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박첨지의 본처 꼭두각시. “소시적 그리 어여쁘던 얼굴이 왜 이리 못생겨졌나!” 물으니 “여자 찾아다니는 영감 찾으려고 죽을 고생으로 못 먹고 돌아다녀 요모냥이 되었다!”고 대답하는 꼭두각시. 꼭두각시는 나중에 첩인 돌머리집과 상면하게 되는데, 첩에게만 살림을 후하게 나누어 주자 중이 되겠다며 길을 떠난다.(이미지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한반도 지역에서는 축첩제도가 권세가들에게나 가능했었다. 그러나 외세의 침략과 해상활동이 많아서 남성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이런 성비불균형으로 제주에서는 거지도 첩을 둔다고 할 만큼 축첩제가 성행했다.

     

    흥미로운 것은 제주도에서는 첩에 대한 평가가 다른 지역들에 비해 너그럽다는 점이다. 여성들의 자유의지로 첩이 되는 경우도 많았고, 첩에 대한 대응도 비교적 각박하지 않았다. 이는 제주여성들이 밭과 바다 등에서 직접 생산노동에 참여하면서 경제적인 자립도가 높았다는데 큰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남편에게 기대지 않아도 자기건사가 가능했다는 거다. 바다로 나가 해난사고를 당하거나 산으로 나간 남성들의 죽음이나 무소식으로 인해 대를 잇고자 하는 욕구, 여성들의 성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현실적인 요구들도 이런 제도가 만연한 하나의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처의 질투도 심하지 않았고 첩이라 하여 지나치게 억울하게 느껴질 만큼 부당한 대우를 받지도 않았다. 경제적으로 자립 능력을 갖춘 첩들이었기 때문에 ‘우리 집’을 거덜 낼 기세로 덤벼들지도, 자신을 내쫓고 자신의 자리에 앉으려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 혼자 아무리 잘 살고 있더라도 남자의 힘이 필요한 경우가 있고, 혼자 사는 여자의, 대를 이으려는 상황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설사 첩이 내 자리를 차지한다 하더라도 먹고살 능력쯤은 있다는 처의 자존심과 자신감도 첩을 너그럽게 대하는 데 한 몫을 했다.

     

    신화를 살펴보더라도 처첩이 등장하는 경우는 많으나 첩과 처가 갈등과 반목으로 주위를 살벌하게 만드는 경우는 많지 않다.

    <송당신화>에서의 백주또와 첩, <차사신화>에서의 강림의 큰부인과 열여덟의 첩, 제주시 용담동에 있는 <궁당신화>의 중전대부인과 정절상군농, <수산리 본향당 신화>의 금백주와 용왕국 막내딸, <보목리 본향당 신화>에서의 신중부인과 새금상따님 등 처첩이 등장하는 신화는 많다.

     

    신화에서 처첩은 서로를 미워하고 반목함으로써 자신도 상대도 파괴되는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다. 갈라서면 그만, 처첩 각자가 이룬 대로 살아가지, 서로 신경을 박박 긁으면서 사나운 모습으로 살지도 않는다. 심지어 처가 첩을 보호하고 동정하거나 첩이 처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도 많다. 처첩 간에 갈등은 당연한 것이지만 실제 제주에서는 첩이 처를 형님이라 부르는 경우도 많으며 둘이 한 집에 함께 기거하는 경우도 있다. 첩의 자식들은 대부분 처의 집, 즉 아버지의 집에 가서 제사에도 참여하고 어려운 일을 돕기도 한다.

     

    송당신화에서 백주또는 남의 소를 잡아먹어 버린 남편 소천국에게, “아니, 우리 집 소를 잡아먹는 것이야 예사로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남의 소를 잡아먹는 것은 소도둑놈 말도둑놈 아닙니까? 우리, 땅 가르고 물 갈라 살림분산 합시다” 라며 이혼한다. 소천국은 집을 나가 자신이 원래 하던 목축을 하며 첩을 얻어 살고 백주또는 그 많은 아이들을 혼자 키운다. 아이가 좀 자라자 아버지를 보여주려 아버지 소천국에게 데려가기도 한다.

    수산리 본향당 신화에서 첩인 용왕국 막내딸은 남편에게, “아니, 그만한 일로 부인을 귀양 보냅니까?” 하며 남편이 귀양 보내버린 큰부인을 찾아가 형님이라 부르면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남편이 잘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큰부인과 큰부인 혼자 키우고 있었던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온다.

    동김녕 송씨 집안의 조상신화에서 첩인 광청아기씨는 진상 가던 송동지에게 서로 옷을 바꿔 입고 밤새도록 색시놀음 하자고 송동지를 꼬시는 첩으로 등장한다. 송동지 입은 연분홍 다홍치마가 벗어지고, 광청아기씨 쓴 갓과 도포가 꿈결처럼 훌훌 벗겨지고, 두 몸이 한 몸이 되니 송동지도 온 세상이 제 세상이 되고, 광청아기도 온 세상이 제 세상이 되어 밤새도록 논다. 이렇게 잘 노는(?) 광청아기였지만, 잘 노는 것은 사랑에 빠진 여자의 모습이었을 뿐이다. 사랑에 한이 맺혀 송동지를 죽음으로 찾은 그녀는 송동지의 집안을 거부로 만들고 아이들에게 명성을 가져다주는 여신이 된다.

    서귀포 본향당 신화에서는 자매가 처첩이 되어 엄청난 갈등과 싸움을 하지만, 그래도 인간사 지 맘대로 안 되는 게 사랑이라, 자매 간 서로 죽일 수는 없으니, 포기하며 서로 각각 자기의 자리를 찾아 꼿꼿이 살아간다.

     

    처첩이 등장하는 한반도 지역의 이야기들은 그녀들 간의 갈등과 반목, 상대의 파괴가 주를 이룬다. 왕실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들이며, 콩쥐팥쥐, 장화홍련 뿐만 아니라 많은 현대의 소설들에서도 거의 한결같다. 논농사와 유교적 질서 중심의 족장, 양반들은 자신들과는 다른 소작인, 여성, 첩, 서자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들어 냈고 그들을 철저하게 차별화시키고 배제시키면서 그들의 욕망만을 지켜왔던 것이다.

     

    여자들은 대규모의 집에 대가족의 식사며 빨래, 곡식을 말리는 일에 종일 시간을 보냈지만 자기 호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남편이 없으면, 집안이 없으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었고 먹고 살 수조차 없었다. 그러니 자리를 보전해야만 하는 그녀에게 첩은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남자의 입장에서도 유일한 혈통에게 가부장의 재산과 권력을 물려주어야 했기 때문에 첩은 성적욕구의 대상, 서자는 배제되어야 할 문제꺼리에 불과했다. 

     

                                   ▲<장화, 홍련> 김지운 감독(2003) 새엄마와 아이들, 슬픈 가족 괴담(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반면 제주에서는 신화에서와 같이 실제 생활에서도 처첩간의 갈등이 적은 편이다. 이는 제주도가 한반도 지역처럼 논농사를 통해 형성된 일가족, 가문 중심의 위계사회, 양반과 지주의 독점 사회가 아니었고 관직에의 기회도 한정적인 사회여서 첩이나 서자들이 냉혹한 배제와 차별에 처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에도 원인이 있다고 보인다.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조각난, 분산된 토지에서 자연스럽게 배태된 평등사상과 개체주의,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마을공동체에 대한 인식과, 마을 안의 사람이면 모두 삼촌이라 부르는 상황에서 어떤 한 여자와 그 아이들을 가혹하게 왕따 시킬 수도 없었던 것이다.


    앞서도 잠깐 말했던 것처럼 여성들의 자신감이 이런 처첩 간의 갈등을 줄였을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주도적이고 중심적으로 생산노동에 직접 참여하고 경제력을 획득한 제주여성들에게 남성, 남편은 그녀의 전부를 거는 존재가 아니었다. 남편이 없거나, 그가 다른 여자에게 가버린다고 먹고 사는 데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를 건사할 줄 알았다. 심지어 그녀들은 자신을 먹여 살려 줄 가장으로가 아니라 대를 잇거나 성적 만족을 나눌 남자가 필요한 까닭으로 스스로 첩이 되는 상황을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처든 첩이든 경제적인 자립의 성취는 주도적이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게 했으며 있어도 그만, 굳이 없어도 그만인 남편이라는 존재를 독점하기 위하여 반목과 질투, 자아분열적인 상처와 혼란에 빠지기는 싫었던 것이다.

     

    노일저대구일의딸이 꼭 첩의 원형은 아니다.

    사리사욕에 눈멀고, 누구에게나 원한 가득하고, 다니는 곳곳에 반목과 불행의 기운을 풍기면서 키득키득 웃는, 그러면서 줏대도 속도 없이 아양이나 떨고 있는 것이 첩의 원형은 아니다. 단지 일부의 여성일 뿐이다.

    남의 피나 빨아먹는 여자 첩. 꼭두각시 처.

    사랑스런 여자, 사랑하는 여자를 이리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을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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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덧글(3)

  • hjh1984 [2015-08-31]
  • 처첩제를 ‘일부일처제의 강력한 남성적 변종’이라 규정짓는 것은 그것의 한 단면만 보고 내린 편협한 판단입니다. 설마 선생님께서는 남성이 여러 부인(婦人)을 두었을 때 그들 간에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 게 여성의 이해(利害)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기성의 사회문화 구조 아래서 남성은 부인의 생활과 안전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했고, 따라서 결혼은 여성의 몫을 보장하는 사회적 장치이기도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이 여러 부인을 둘 경우, 첫째 부인에게 돌아갈 수 있는 몫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만약 부인들 간에 위계가 없다면 첫째 부인의 박탈감은 한층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첫째 부인과 다른 부인들 간에 위계를 두는 것은 여성의 이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 hjh1984 [2015-08-31]
  • 실제로 이슬람사회의 일부다처제에서도 부인들 간의 위계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물론 처첩(妻妾) 간의 갈등이 거의 없었던 제주도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지만, 역사상 일부일처제를 고수하지 않았던 수많은 사회에서 발견되는 부인들 간의 위계가 남성의 이해에만 부합했다고 단정 짓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처첩 간의 위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처의 몫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으며, 바꾸어 말하면 처첩제는 처라는 지위를 부여받은 여성의 이해를 대변하는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울러 지난번 말씀드렸듯이 처첩제 아래서 첩과 서자(庶子)도 처와 적자(嫡子)보다 위상이 낮을 뿐, 엄연한 인사이더(insider)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첩과 서자가 각각 ‘성적욕구의 대상’ ‘배제되어야 할 문제꺼리’에 불과했다면, 역사적으로 빈(嬪), 군(君), 옹주(翁主) 등의 칭호가 명예로운 것으로 간주됐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게 되니까요.
  • hjh1984 [2015-08-31]
  • 기성의 사회문화 구조 아래서의 남녀관계는 기본적으로 남녀 모두의 욕망이 반영된 상호관계였고, 이는 처첩제 아래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럽처럼 첩과 서자를 악(惡)으로 간주한 사회는 남성에게 첩을 둘 권리를 허락하지 않았고, 동아시아처럼 남성에게 첩을 둘 권리를 허락한 사회는 첩과 서자에게도 일정한 몫을 보장했습니다. 또한 처첩 간의 위계도 처의 이해와 무관하지 않았고 말입니다. 물론 처첩제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지만, 선생님처럼 이를 일방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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